== CWO의 소개

1943년 창당한 「국제주의코뮤니스트당」(PCInt)의 주요 설립자 중 한 명인 오노라토 다멘의 저서 『보르디가, 이탈리아 좌파의 역사에서 경험의 강점과 약점』(Bordiga, validita e limiti d' una esperienza nella storia della "sinistra italiana")에서 발췌한 내용을 소개한다. 이 글들은 모두 1951년 보르디가주의 「국제코뮤니스트당」(ICP)의 결성과 함께 절정에 달했던 당의 분열과 관련된 것으로, 당의 주요 기관지 이름을 따서 '프로그라마 코무니스타(코뮤니스트 강령, Programma Comunista)'라고도 불렀다. 따라서 다음 문건에서는 이들을 ‘강령주의자(Programmatists)’라고 부른다. 과거의 특정 논쟁을 언급하는 저작을 출판하는 것은 항상 어려운데, 당시에는 당연하게 여겨지던 문제들이 후대, 특히 이탈리아 이외의 이들에게는 명확하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는 몇 가지 언급을 통해 이를 극복하려고 노력하였다.

보르디가는 러시아 혁명 이후 「이탈리아 코뮤니스트당」(PCd'I)의 설립을 위한 투쟁과 항상 그의 이름이 연관되어 있기 때문에 국제적으로 유명한 인물이다. 다멘 역시 이탈리아 사회당(PSI) 좌파의 일원이었지만,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육군에서 혁명적 패전주의 활동을 했다는 이유로 감옥에 갇혀 있었기 때문에 전후 코뮤니스트당 설립을 위한 투쟁에서 그의 역할은 제한적이었다. 그러나 두 사람 모두 1921년 리보르노 회의에 참여하여 사회당(PSI)에서 분리해 나와 코뮤니스트당(PCd'I)을 결성했다. 다멘은 파시스트와 국가 정부에 의해 여러 차례 체포되어 공격을 받았다. 1923년 그는 이주민 노동자들을 위한 이탈리아어 신문을 발행하기 위해 코민테른(코뮤니스트 인터내셔널)에 의해 잠시 프랑스로 파견되었다. 1924년에 돌아왔을 때 그는 코민테른이 '볼셰비키화'(모든 코뮤니스트당을 모스크바에 종속시키는 것) 과정의 일부로서 보르디가(이미 1923년에 체포된 적이 있는)를 코뮤니스트당 지도자에서 해임하고 그람시로 대체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다멘은 이러한 당의 변질에 반대했지만, 보르디가가 이를 사실상 소극적으로 받아들인 것에 대해서도 비판했다(보르디가는 이탈리아에서 좌파가 다수파였지만 당은 제3인터내셔널의 일부였고, 그 안에서 좌파는 소수였다는 형식적 근거를 들어 주장하였다). 다멘은 프란체스카 그로시(Francesca Grossi), 브루노 포르티키아리(Bruno Fortichiari), 루이지 레포시(Luigi Repossi) 등과 함께 1925년 코민테른이 당에 강요하는 것에 맞서기 위해 합의위원회(Comitato d'Intesa)를 조직하였다. 보르디가는 이 강령에 서명했지만, 코민테른과 당 지도부는 이 위원회의 해산을 요구했다. 다멘은 파시스트 정부에 체포되어 1926년 우스티카 섬에 수감되었고, 곧 보르디가와 그람시가 합류했다. 세 사람은 곧바로 당 학교를 설립하고 각각 경제, 정치, 역사에 대해 서로 다른 강의를 진행하였다.

결국, 보르디가는 석방되었고, 다멘과 보르디가는 각각 1929년과 1930년에 PCd'I에서 제명되었다. 이 시점에서 보르디가는 엔지니어로 돌아가 나폴리에서 더 이상의 정치적 접촉을 거부하며 살았다. 다멘은 스탈린주의자와 파시스트에 계속 반대했고 1943년 (무솔리니가 몰락하며) 마지막 사면을 받을 때까지 수 차례 체포되었다. 그 해에는 이탈리아 북부에서 대규모 파업이 일어났고, 스탈린이 (미국과의 동맹을 공고히 하기 위해) 공식적으로 코뮤니스트 인터내셔널의 끝을 선언하였다. (코민테른이 세계혁명을 지원하지 않은 지 오래였기 때문에) 순전히 형식적인 행사였지만, 다멘은 이를 「국제주의코뮤니스트당」을 출범시키기 위한 명분 중 하나로 사용했다. 보르디가는 다멘의 제안을 받았지만, 아래에 제시한 이유로 신당 가입을 거부하였다. 사실 그는 이미 지지자들에게 이탈리아 코뮤니스트당에 입당할 것을 촉구했다. (주 - 앞으로 이탈리아 코뮤니스트당은 "이탈리아의 코뮤니스트당"이 아니라 "인터내셔널의 이탈리아 지부"를 말한다. 톨리아티의 당은 이미 전후 민주주의를 재건하기 위해 모든 종류의 부르주아 세력과 동맹을 맺었기 때문이다.) 다멘은 자신의 암살을 준비한 스탈린주의자들과 계속해서 싸웠다. (실제로 PCInt의 국제주의자 마리오 아쿠아비바와 파우스토 아띠가 살해당했다.) 이 무렵 보르디가는 마음을 바꿔 지지자들에게 PCInt 지지를 촉구했지만, 1951년 그가 실제로 분열을 일으키기 전까지는 정작 합류하지 않았다. 다멘은 파시즘의 위협과 러시아의 본질에 대한 보르디가의 혼동을 아래 글에 나열하고 있지만, 글의 핵심은 당이 내부적으로 어떻게 조직되어야 하는지이다.

(그람시-톨리아티 분파가 최종 승리를 거둔) 리옹 당대회에 좌파가 제출한 테제에서 당 내 규율은 '유기적 중앙집중주의'라는 방식을 통해 다뤄져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해결책은 러시아의 역사적 경험이 불완전하기 때문에 초기 책립이 부족한 위계적 권위주의의 무의미한 확대에 있지 않으며, 볼셰비키 전통의 수호자인 창립 당원 내에서도 선험적으로 최선이라고 할 수 없는 방식으로 의견 불일치가 해결되어 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맑스주의에서 형식적 민주주의 원칙을 체계적으로 적용하는 것 역시 해결책은 아니며, 이는 때때로 편리한 조직적 관행으로서의 기능 외에는 다른 기능을 하지 못한다. 코뮤니스트당은 기층과의 최대한의 협의를 포함하면서도 자신을 차별화하려는 모든 집단을 자발적으로 제거할 수 있는 유기적 중앙집중주의를 달성해야 한다. 이는 레닌의 말처럼 형식적이고 기계적인 위계질서로는 달성할 수 없으며 올바른 혁명적 정치를 통해서만 가능하다."

보르디가는 PCInt를 분열시킨 논쟁에서 이 공식(과 코민테른의 다른 많은 공식)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다멘은 여기서 보르디가가 주장한 '유기적 중앙집중주의'가 당내 독재를 위한 방안이었다고 주장한다. 사실 보르디가는 이 개념을 (투표나 '형식적 민주주의'가 필요할 때 이를 요구했던) 리옹 테제보다 한 단계 더 발전시킨 것이다. 이제 보르디가는 당이

"착취당하는 대중과 항상 더 넓은 접촉을 재건하는 목표를 추구하며, 민주적 중앙집중주의와 모든 투표 구조를 없애고 모든 당원이 그들의 이념에서 민주주의, 평화주의, 자치주의, 자유주의 경향에 대한 인정을 없앰으로써 모스크바 인터내셔널이 시작부터 가지고 있었던 오류를 제거해야 한다. _

…고 주장하였다."

다멘은 중앙집중주의의 유기적 측면을 완전히 거부하지는 않지만, 민주적 중앙집권주의가 완벽하지는 않지만 세계 프롤레타리아 당의 당원과 선출된 지도부 사이의 관계, 즉 '자유와 권위 사이'를 유지할 수 있는 유일한 건강한 방법이라는 점을 다시 한 번 강조한다. 즉, 어떤 시점에서는 불가피하게 당원들의 투표를 통해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또한 당원들이 혁명 투쟁에 적절히 대비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이러한 메커니즘이 당 내에서 필수적이라고 주장한다. 그의 민주적 중앙집중주의 주창은 민주적이지 않은 순수한 중앙집중주의라는 용어 뒤에 숨어 있던 스탈린주의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그는 당내 민주주의에 대한 보르디가의 경멸은 스탈린주의에 가까울 뿐만 아니라 1952년 당이 분열된 후 이미 그의 지지자들에게 심각한 결과를 가져왔다고 주장했다. 보르디가주의 흐름은 여러 차례 분열했으며(부분적으로는 다멘의 주장대로 유기적 중앙집중주의를 유지하려 한 결과), 각 분파는 자신이 프롤레타리아 전위대의 진정한 구현이라고 주장하였다. 보르디가의 옛 제자 중 한 명으로 1966년 그와 갈라져 불변성(Invariance)을 결성한 자크 카마트(Jacques Camatte)는 민주적 중앙집중주의를 거부했지만(부르주아 민주주의와 동일하다는 잘못된 주장을 내세우며), ‘유기적 중앙집중주의’의 결과에 대해 더욱 비판적인 결론을 내렸다.

"당의 중앙위원회 또는 모든 종류의 재편성 중심은 국가와 같은 역할을 한다. 민주적 중앙집중주의는 형식적 지배의 특징인 의회 형태를 모방하는 데 그쳤다. 그리고 민주주의와 그 형태(다수, 투표, 의회 등에 대한 소수의 예속)를 거부하는 부정적인 방식으로만 긍정되는 유기적 중앙집중주의는 실제로는 더 현대적인 형태에 다시 갇히게 될 뿐이다. 그 결과 (파시즘과 마찬가지로) 조직의 신비가 생겨난다. 이것이 바로 PCI(국제코뮤니스트당)이 갱단으로 진화한 방식이다."

1970년 보르디가가 사망한 후 많은 다른 당들이 뒤를 이었기 때문에 불변성은 코뮤니스트 강령(Programma Comunista)에서 분리된 유일한 당은 아니었다. 새로운 국제코뮤니스트당들이 생겨났고, 이들은 모두 같은 당명을 사용하며 자신들이 진정한 정당이라고 주장하였다(보통 출판물의 명칭을 통해 알려졌다). 보기를 들어, 보르디가주의 흐름이 크게 붕괴된 후 1974년에 코뮤니스트당(Il Partito Comunista)이, 1982년에 코뮤니스트(Il Comunista)가 결성되었으며, 이후 몇 년 동안 이상적인 정당의 역할을 주장하는 소규모 그룹이 더 많이 생겨났다. 다멘은 이 글에서 이 모든 분열이 이른바 '유기적 중앙집중주의'라는 형태로 내부 논쟁을 억압하려는 시도의 결과라고 지적한다.

== 중앙집중적(중앙화한) 당은 맞고, 당에 대한 중앙집중주의는 아니다!

먼저 '강령주의자'(보르디가주의자)들이 결코 '유기적'으로 정의할 수 없었던 중앙화의 문제를 다루어야 한다. 이것은 역사적 경험에 대한 해석과 연관되어 있기 때문에, 단순히 형식적이고 학문적인 추상으로 환원할 수 없다.

이 혼란스러운 ‘좌익 코뮤니스트'들은 레닌의 인터내셔널에 '순수한 코뮤니스트당'은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에 민주적 메커니즘의 사용은 특정 역사적 시기의 상황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었다고, 따라서 '순수 코뮤니스트당'으로 구성된 제3 인터내셔널과는 상황이 다른 인터내셔널은 레닌의 죽음과 함께 더는 작동하지 않는 민주적 중앙집중화가 아니라 다른 내부 메커니즘에 의해 식별되어야 한다는 것이 분명하다고 주장한다. 그 이후, 스탈린주의 시대에 일어난 일은 노동계급 및 혁명의 목표와 관련이 없으므로 그들의 분석에서 다뤄지지 않았다.

그러나 '강령주의자'들처럼 '불순한 당들'으로 구성된 레닌의 조직과 달리, 화학적 순결함의 상태에 있는 '순수한 코뮤니스트당'으로 구성된 인터내셔널은 형이상학적인 역설을 가지고 노는 것이다. 변증법적 유물론의 렌즈를 통해 일련의 역사적 사건의 문제를 공식화하는 대신, 이들은 가장 낡아빠진 관념론의 안개 속에서 길을 잃어버릴 형식적이고 기계론적인 계산을 택했다.

우리는 순수한 코뮤니스트당의 인터내셔널은 존재하지 않을 것이며, 다양한 이해관계, 사회적 조건, 문화 등으로 분열된 사회의 선과 악, 모순과 부조리를 그 안에 반영할 인터내셔널만이 존재할 것이라고 이 동지들에게 확실하게 말할 수 있겠다. 순수한 상태의 코뮤니스트당이 마찬가지로 순수한 세계 조직을 가진다는 가정은, 단순한 열망일지라도, 맑스주의에 기반을 둔 진지한 연구에서 나올 수 없는 결론이다. 이는 이상하게도 파시즘 20년 동안 전성기를 누렸던 어떤 신비주의와 닮았다.

레닌의 인터내셔널은 제2인터내셔널의 붕괴 이후 역사적 시기의 미성숙과 자본주의 세계에 닥친 위기로 인해 분명히 약점을 가지고 있었다. 모든 프롤레타리아 조직은, 더 발전된 방식으로, 반(反)비례적인 규모일지라도, 그 조직이 형성된 역사적 시기의 특성을 재현한다. 그리고 오늘날 국제 프롤레타리아당 재건에 기여할 권리를 주장하는 다양한 좌익 코뮤니스트 그룹이 활동하는 객관적 조건에서 충분히 증명되었듯이, 제3인터내셔널에 존재하는 부정적인 측면은, 다른 형태로 나타나더라도 미래의 국제 조직에서 존재할 것이 확실하다. 이 그룹 중에서 편협함과 위기를 가장 많이 겪고 있는 그룹은, 내부 모순의 폭발적인 순환에서 볼 수 있듯이 민주적 중앙집중화의 역학 관계가 더 깊게 작용하는 보르디가주의 '코뮤니스트 강령'이다. 오늘날 '강령주의자'들은 논리적 편의를 위해 제3인터내셔널을 '불순한' 정당들로 구성된 것으로 치부하려고 한다. 그러나 보르디가가 이전에 레닌의 인터내셔널을 어떻게 판단했는지는 현재의 입장과 명백히 모순된다.

"프롤레타리아적 이론을 회복한 후, 제3인터내셔널의 실천적 작업은 모든 국가의 기회주의자들이 제기한 분열을 뛰어넘어 모든 유형의 개량주의자, 사회민주주의자, 중도파들을 세계 전위 대열에서 배제하는 데 우뚝 섰다. 이 쇄신은 모든 옛 정당들에서 일어났으며 프롤레타리아트의 새로운 혁명 정당의 기초가 되었다. 레닌은 모든 혼란과 약점을 없애는 어려운 작업을 철권으로 이끌었다."

이 보르디가주의자들의 진정한 강점은 불일치에 존재한다!

계급투쟁의 폭풍 속에서가 아니라 뒷방에서 여과되고 정제된 맑스주의를 가지고 귀족적이고 지적인 엘리트 구조를 가진 이 집단이 어떻게 우리가 말하는 것의 정확성에 대해 이의를 제기할 수 있는가?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레닌주의적 정직성을 가지고 중앙집중주의의 두 얼굴에 대한 논쟁을 해결할 수 있는가?

제국주의적 독점과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단계에서 고도로 중앙집중화된 구조에 기초하지 않는 혁명당 조직도 존재할 수 없다. 아마도 이것이 의회 정당과 가장 극적으로 구별되는 특징일 것이다. 따라서 중앙화가 계급 갈등에 의해 부과된 필수 요건이라면, '민주적'과 '유기적'이라는 속성은 이러한 중앙집중화의 본질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 논쟁적인 구분의 주관적인 용어를 정의한다. 이 중앙집중화에 관여하는 기관들이 민주주의의 도구(아래로부터의 능동적이고 실제적인 참여와 통제)를 어디까지 활용하고, 권력의 중심이 지도자의 물리적 인격에서 어디까지 권위주의 체제에 그리고 지도자를 통해 중앙위원회에 얼마나 기반을 두고 있는지 누가 절대적으로 정확하게 말할 수 있겠는가?

"강령"의 보르디가주의자들에게 이 문제는 스탈린주의의 반(反)혁명적 실천에서 유래한 측면에서 제기된다. 이것이 그들이 "유기적 중앙집중화"라는 이름의 진행되는 그들의 희한한 이론을 정의하기 위해 최종적으로 시도한 방법이다. 우리는 그것을 공식화했던 것과 같은 단어로 위에서 재현했다.

그러나 중앙과 평당원 사이에 존재하는 모든 관계를 명확히 해야만 당이 레닌주의 원칙에 따라 구조화되고 작동할 것이다. 당원과 당 중앙 사이에는 지속적인 변증법적 관계가 존재한다. 당 지도부가 전술적 행동을 전개하는 것은 분명히 이러한 관계에 기초하여 이미 합의된 이론적, 정치적 강령의 맥락에서 이루어진다. 레닌은 이론적으로나 정치적 행동에서 조직이 행동할 수 있는 다른 방식을 옹호한 적이 없다. 그리고 중앙위원회나 지도자가 이미 계획된 일련의 가능한 행동의 “집합”과 관련하여 오로지 자신의 능력에만 의존하는 조직 공식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이른바 당원들은 지도부가 지시하는 행동을 수행하도록 유용하게 명령받을 수 있다."

이는 프롤레타리아 독재에서 모든 노동계급 요소가 제거된 후 스탈린 치하의 중앙위원회 정책과 같은 의미이다. 당원과 당 지도부 사이의 깊고 돌이킬 수 없는 파열과 그로 인해 자본주의의 공개적인 재구축으로 이어지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러시아 코뮤니스트당 중앙위원회와 스탈린 자신이 이미 계획된 일련의 가능한 행동의 “집합”에 묶여있었으며, 이는 용어상으로나 현실적으로나 똑같이 정확하게 수행될 것이라는 것을 우리 모두가 알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가 비난하는 것은 혁명당을 자임하는 당의 중앙 기관이 조직 구성원의 통제와 범위를 벗어나 활동할 때 발생하는 비참한 결과물이다.

그러나 우리의 경험에 비추어 볼 때, 우리는 중앙이 지시한 행위를 수행하기 위해서만 필요한 정치 구성원과 우리에게 그다지 고무적인 광경을 제공하지 않는 예지력과 점술의 권한을 위임받은 중앙 사이의 우스운 구별을 가정하거나 가정하도록 허용하는 자들을 정확하게 비난해야 한다. 그리고 여기서 우리는 준비성과 오랜 투쟁력 면에서 매우 숙련되고 전체 당의 존경과 신뢰를 받는 동지들을 상대하고 있다.

이탈리아 코뮤니스트당(PCd'I)의 지도부는, 코민테른에 대한 보르디가의 선언을 통해, 로마 진군이 일어나던 바로 그 시기에 파시즘의 집권 가능성을 부정하는 일련의 가능한 가능성에 얽매이지 않았는가? 그리고 이 관점의 눈에 띄는 오류는 "그에 못지않게 예측 가능한 결과에 상응하는” 공세를 위한 공세 전술로 당을 위태롭게 한 것이 아니었는가?

그리고 10월 혁명을 사회주의 혁명으로 칭송한 이후, 러시아 경제에 대한 '과학적' 분석을 통해 10월 혁명을 반(反)봉건 혁명으로 정의한 사람은 누구였는가? 보르디가가 (Lenin nel cammino della rivoluzione에서) "혁명은 노동계급에 의해, 노동계급을 위해 러시아에서 이루어질 것"이라고 단언하지 않았던가? 그리고 더 나아가 "소비에트 권력이 승리했고, 맑스가 예견한 프롤레타리아트 독재가 역사의 무대에 엄청난 입성을 했다"고 단언하지 않았던가?

국제주의코뮤니스트당 결성 당시, 당과 '좌익 코뮤니즘'의 가장 저명한 옹호자였던 그는 노동자들이 톨리아티의 당에 있다는 핑계로 '민족코뮤니스트당'(PCI)(1)과 직접 싸우는 것을 실수라고 여겨 당의 '투사'가 되기를 거부했던 것을 어떻게 판단해야 하는가? 그 이후 우리의 분열이 일어났을 때, 그는 정치적으로 중도화되어, 항상 이해되지 않는 공식을 반복하는 종파로 전락한 채, 그에게 남은 잔당은 그대로 유지된다는 PCd’I에 들어가는 것에 동의하지 않았는가?

그가 러시아는 국가자본주의라는 우리의 정의를 거부하고 러시아를 겉만 그럴싸한 형태의 "산업 국가"로 추측했을 때, 제2차 세계대전과 러시아가 주요한 제국주의적 행위자로서 수행한 역할의 본질에 대한 비판적 검토의 발전에서 그가 기여한 것이 무엇인가?

계속 질문할 수 있지만, 우리는 그들의 명망이나 점성술이 어떻든 간에 중앙위원회나 이 사람 저 사람에게 우리의 이론을 임의로 발전시키는 과업과 지도자로서의 기능을 총체적인 당 밖에서 그리고 위에서 부과하자는 그의 주장이 얼마나 빈약하고 불안정하며 객관적으로 위험한지를 충분히 보여주었다.

우리가 말하는 가장 개인적이고 가장 결정적인 레닌, 즉 ‘4월 테제’의 레닌은 오해와 타협에 기반을 둔 입장을 가진 볼셰비키당 중앙위원회의 형식적인 조직을 넘어 "수병들에게 가자"는 절박한 결의를 가지고 있었다. 레닌은 여기서 유기적이거나 심지어 민주적 중앙화에 따라 움직인 것이 아니라, 다가오는 혁명의 주축으로서, 노동계급의 요구를 이해하고 지지한 유일한 사람으로서, 계급적 지형 위에 굳건히 발을 딛고 있었기 때문이며, 계급의 관점에서, 계급을 위해 생각하고 일했으며, 혁명은 행동을 좋아하고 하루 늦게 나타나는 겁쟁이를 싫어한다는 매우 생동감 있는 역사의식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당원과 당 지도부 사이의 이 끊임없는 변증법적 관계 속에, 자유와 권위의 필연적인 통합 속에 전문적 반대자들이 너무 많은 관심을 기울인 문제의 해법이 존재한다.

단순한 추상이 아닌 그 어떠한 혁명당도 폭력과 도전받지 않는 권위가 지배하는 역사적 환경 속에서 계급투쟁의 문제를 다루어야 한다. 오직 강철 같은 단결을 중심으로 조직해야 점점 더 살아 있는 투쟁의 무기가 될 수 있다. 따라서 그 대열은 반(反)혁명의 전반적인 위세에 대항하여 굳건해야만 한다. 혁명당은 부르주아 정당을 모방하는 것이 아니라, 혁명 투쟁의 객관적 조건에 맞게 조직 구조를 조정해야 할 필요성을 준수한다.

행동에 있어 혁명당의 핵심적인 전술 원칙은 혁명당이 활동하는 지형의 특성을 고려하고 당원들이 자신의 임무를 위해 충분히 준비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중앙화 문제에 대해 이견이 있을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 이는 우리가 ‘민주적’ 또는 ‘유기적’이라는 용어로 이야기할 때만 시작된다. '유기적'이라는 용어의 사용, 더 나쁘게는 남용은 지도부와 당원들 사이에 존재해야 하는 변증법적 관계를 깨뜨리는 권위주의적 퇴보의 형태로 이어질 수 있다. 레닌의 경험은 여전히 유효하며, '민주적' 중앙집중주의와 '유기적' 중앙집중주의 사이의 모순처럼 보이는 것을 단일한 관점으로 통합할 수 있어야 한다.

-- 오노라토 다멘

== 주

(1) 이탈리아 코뮤니스트당(PCI)은 전쟁 후 톨리아티의 지도 아래 완전한 스탈린주의 정당으로 결성되었다. 이탈리아 코뮤니스트당은 더는 국제주의적 명분을 갖지 않는다는 상징으로 옛 이름(PCd'I)을 버렸다.